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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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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나눔이2 2022. 3. 10.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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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 밤
하룻 밤을 산정호수에서 자기로 했다

고등학교 동창들 30년만에 만나
호변을 걷고 별도 바라보았다

시간이 할퀸 자국을 
공평하게 나눠 가졌으니
화장으로 가릴 필요도 없이
모두들 기억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우리는 다시 수학여행 온 계집애들 
잔잔하지만 미궁을 감춘 호수의 밤은 
깊어갔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냥 깔깔거렸다

그 중에 어쩌다 실명을 한 친구 하나가
'이제 나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년'
이라며 계속 유머를 터뜨렸지만
앞이 안 보이는 것은 그녀뿐이 아니었다

아니, 앞이 훤히 보여 허우적이며
딸과 사위 자랑을 조금 해보기도 했다
밤이 깊도록
허리가 휘도록 웃다가 몰래 눈물을 닦다가
친구들은 하나둘 잠이 들기 시작했다


내 아기들, 이 착한 계집애들아
벌써 할머니들아

나는 검은 출석부를 들고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가벼이 또 30년이 흐른 후
이 산정호수에 와서 함께 잘 사람 
손들어봐라

하루가 고단했는지 아무도 손을 드는 
친구가 없었다.

-현대시학 2003.10- 
 

▶ 글(詩) : 문정희
▶ 음악 : 스카브로우의 추억 
      (Scarbrough Fair)
▶ 편집 : 송 운(松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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