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지공거사의 일갈
지하철 일반석 앞에서
백발의 한 늙은이 손잡이에 매달려 가는 걸 보고
자리를 잡고 앉아있던 젊은 사람 하나 혼잣말인 듯 중얼거린다
지하철 공짜로 타는 주제에 남의 자리까지 넘보고 있구먼…
귀 밝은 이 노인 알아 들으시고 젊은이를 내려다보며 한 말씀 하신다
어, 젊은 친구! 나라 잃은 설움 겪어 본 적 있나?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 나가 싸워본 적 있나?
주린 배 움켜잡고 새벽부터 새마을운동 해 봤나?
수백 미터 땅속에 들어가 석탄 캐 본 적 있나?
열사의 땅 저 중동에 가서 막노동해 본 적 있나?
여봐 젊은이! 오늘날 이만큼 잘 살게 된 건
지나간 세대―늙은이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걸 모르나?
내가 공짜로 지하철을 탄다고?
자네가 이렇게 편하게 잘 살 수 있는 건 누구 덕인데?
이 나라와 사회를 위해 자넨 뭘 했나?
민주화 투쟁을 했다고?
껍적대지 마라 이 우라질 놈!
○ 글(詩) : 임보 ○음악 : 산다는 것은 / 김종찬 ○편집 : 송 운(松韻)
두 가지 깨달음
/ 임보
모처럼 동네 이발소에 간다고 아내에게 신고하고 밖엘 나온다
'날씨가 꾸물하니 우산을 챙겨 가세요!'
아내의 충고를 무시하고 그냥 나온 내게 '비가 오면 전화 하세요!'
아내가 다시 당부한다
아차! 마스크를 미처 못 챙기고 나왔다 길에 가는 사람들을 보자 생각이 났다
다시 집에 돌아가기는 귀찮고 해서 약방에 들러 마스크를 사서 끼고 이발소로 간다
이발을 하는 동안 창밖을 보니 행인들이 우산을 쓰고 지나간다
이발을 다 끝내고 나오려 하니 비가 억수로 쏟아진다
집에 연락을 하려고 주머니를 만져보니 휴대폰이 없다
어떻게 하지? 주변에 우산 파는 상점도 없는데…
전화기를 빌어 집에 연락을 해 본다?
그런데 아내의 전화번호가 깜깜하다
내 휴대폰에서 아내의 번호는 늘 1번이므로
아내의 진짜 전화번호는 내 뇌리에서 이미 사라졌다
장대비를 맞으며 빗속을 달리면서 깨닫는다
아내의 말을 잘 들으면 만사형통이라는 진리를!
비에 흠뻑 젖어 장닭처럼 허둥대며 비로소 깨닫는다
그 휴대폰이 바로 내 생명줄이라는 사실을!
가장 맛있는 밥상
/ 임보
산해진미로 가득한 교자상이라고요?
배가 꼬르르 시장할 때 마주한 밥상이라고요?
그게 아니고요 내 아내의 학설인데요
'남이 차려준 밥상'이래요!
그런 아내에게 평생 나는 맛없는 밥만 먹게 했으니…!
[4단시]
싶다가도
/ 임보
황혼 이혼을 보면 용감하다 싶다가도
이제사 저 짐을 벗고 뭘 하려나 싶기도 하고
황혼 재혼을 보면 대단하다 싶다가도
이제사 새 짐을 지고 어쩔려나 싶기도 하고
시詩를 / 임보
미당未堂은 노래라 믿었고 대여大餘는 말놀이라 여겼다
말장난에 말지랄들 시인들은 다 정신착란증 환자들!
*미당은 서정주, 대여는 김춘수 시인의 아호다. 예나 지금이나 시인들이란 어디가 좀 모자란 사람들인지 모른다.
임보 4단시집'수수꽃다리'도서출판 움.2019
시인론(詩人論)
/ 임보
한 소년이 시인은 무엇하는 사람이냐고 묻기에
아름다운 노래 만들며 살아가는 제법 멋있는 사람이라고 일러 주었다.
한 청년이 또 시인은 무엇하는 사람이냐고 묻기에
과학자가 현미경이나 망원경으로도 볼 수 없는 그런 것까지 보고 가는
눈이 깊은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한 장년이 그런 질문을 또 하기에
가난하게 살지만 세상을 여유있게 하는
다정하고 게으른 사람이라고 했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지나갔다.
한 노인이 멈춰 서서 소매를 붙들고 또 그렇게 물었다,
'정말 시인은 무엇하는 놈들이냐'고
‘죽음을 너무 일찍 깨우친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놈‘이라고
그의 막힌 귀에 대고 악을 썼다
임보(林步) 시인
1940년 전남 승주출생.본명:강홍기(姜洪基)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한국현대시운율연구>로 문학박사 1962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시인 등단
1974년 첫시집 <임보의 시들>이후 2011년 <눈부신 귀향> 등 20여권의 시집 및 많은 동인지와 시론집 펴냄. 2014년 제30회 윤동주 문학상 수상.
충북대 국문과 교수 역임. 현재 월간<우리시>편집인 필명 임보(林步)는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랭보에서 따온 것이라 함. 논저「한국현대시 운율구조론」『엄살의 시학』등 다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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