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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일은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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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나눔이2 2023. 5. 23.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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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이 많은 사람은 
이익을 구함이 많기 때문에 고뇌도 많다

그러나 욕심이 적은 사람은  구하는 것이 없기에 근심도 적다. 

또 욕심을 없애려 노력하는 사람은  마음이 편해 아무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고,    하는 일에 여유가 있어 각박하지 않다 

그래서 마침내 고뇌가 말끔히 사라진 해탈의 경지에 들게 되니 
이를 소욕(小慾)이라 한다

고뇌에서 벗어 나고자 한다면 먼저 만족 할 줄 알아야 한다. 
넉넉함을 아는 것은 부유하고 즐거우며 안온(安溫)하다. 

그런 사람은 비록 맨땅 위에 누워 있을 지라도 편안하고 즐겁다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설사 천상에 있을지라도 흡족하지않을 것이다

만족할줄 모르는 사람은  부유한 것 같지만 사실은 가난하고    만족할줄 아는 사람은 가난한것 같지만 사실은 부유하다

이것을 자족이라 한다 

      - 법정 스님 -    
 


※항상 청춘임을 잊지 마라※

강태공은 80에 세상에 나와서 주나라 800년 기틀을 잡았다!

어릴 적, 강가에서 잡은 송사리를 마당 연못에 풀어놓고 열심히 밥을 줬다.   

“송사리야, 빨리 커서 잉어가 되라.” 
그때 같이 살던 사촌형이 비웃으며 말했다.   

“이 바보야, 피라미나 송사리는 아무리 밥을 많이 줘도 절대 잉어가 될 수 없어. 그것도 몰랐냐?”

나는 형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송사리가 크면 잉어가 될 수 없는 걸까.   

마치 소년의 꿈처럼 언젠가 송사리가 잉어가 되리라 굳게 믿으며  매일매일 연못가에 나와 밥을 줬던 추억이 있다.

이 세상에는 불가사의한 일이 있다.  특히 과학과 의학만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 

1995년 미국 사이언스지에 실린 글이다.    미국의 미드 오숀 호수에 살고 있는 물고기는  수컷이 수백 마리의 암컷 물고기 떼의 리더로 살아간다. 

그런데 리더인 수컷이 죽으면    바로 뒤의 암컷 물고기의 유전자가 바뀌면서 수컷으로 변해  새로운 물고기 떼의 리더가 된다고 한다.    신기한 발견은 이 뿐만이 아니다. 

미국 애리조나 주의 유명한 독사 방울뱀은  주식으로 다람쥐를 잡아먹는다고 한다.    방울뱀이 다람쥐를 물면 독이 주입돼  다람쥐의 몸이 서서히 마비가 되어 결국 방울뱀의 먹이가 된다.

그런데 한 동물학자가 예외의 경우를 목격했다. 

어떤 다람쥐는 방울뱀에게 물렸는데도 불구하고  신경이 마비되지 않은 채 날쌔게 도망을 치더라는 것이다.    너무 신기해 그 다람쥐를 쫓아가 포획해 보니 다람쥐는 새끼를 밴 암컷이었다. 

임신한 암컷 다람쥐는 새끼를 살려야 한다는 보호본능으로    방울뱀에 물리면 그 즉시 방울뱀의 독을 해독하는 호르몬이 분출돼  무사히 방울뱀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다.

나는 이 글을 읽는 순간 무릎을 탁 쳤다.    만약 세상에 우리가 모르는 진실들이 많다면    분명 송사리도 잉어가 될 수 있으리라 믿었던 나의 꿈도  그리 허황된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났다. 


고사성어에서
엿본 삶의 지혜

 '六十不種樹'
(육십 부종수)  


'60세가 넘으면 나무를 심어도 열매를 못 보니
심지 않는다' 는 '고사성어' 인데,

사람들은 대부분 60살이 넘으면   

노인행세를 하며 일을 하지 않고
그럭저럭 노년을 보내려고 한다.  

그러나,씨를 뿌리면,  

나무는 자라 열매를 맺으며,
고목이 되어도 꽃을 피우니,  

나이가 들어도
무슨 일이든지 쉬지않고 해야 한다는 경구이다  

(📚책에서 읽고,다듬어 쓴 글.)



🙋‍♂️좋은 생각 좋은 말만 하고 살아야 하는 이유🙇‍♂️ 

"말이 씨가 된다."

슬픈 노래를 부른 가수들은 대부분 일찍 타계 했다. 
가수의 운명과 노래 가사와는 상당한 상관 관계가 있다고 한다. 

신나고 즐거운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은 장수하고,
고통, 이별, 죽음, 슬픔, 한탄의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단명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가수 윤심덕은 "사의 찬미"를 불렀다가 그만 자살로 생을 마감 했다. 

60년대 말, "산장의 여인"을 부른 가수 권혜경은 가사처럼 자궁과 위장에 암에 걸렸고 요양을 하며 재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녀는 산장에 집을 짓고 수도승처럼 쓸쓸히 살았다. 

"수덕사의 여승"을 부른 가수 송춘희는
결혼을 하지 않은 채 불교 포교사로 지냈다.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을 부르고 슬픈 인생을 살다가 가슴앓이 병으로 49세에 세상을 떴다. 

가수 양미란은 "흑점"이란 노래를 남기고 골수암으로 숨졌다. 

가수 박경애는 향년 "곡예사의 첫사랑"의 가사에 죽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있다.
울어봐도 소용없고, 후회해도 소용없다.
나이 50에 폐암으로 세상을 떴다.

"머무는 곳 그 어딜지 몰라도"를 부른 박경희도 그 노래처럼 53세에 패혈증과 신장질환 으로 별세했다. 

천재 작곡가라고 알려진 장덕은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를 부르고 요절 했다. 

남인수는 "눈감아 드리리"를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41세의 한창 나이에 '눈감아 드리오니'의 노랫말 처럼 일찍 눈을 감고 말았다. 

"0시의 이별"을 부른 가수 배호는 0시에 세상을 떠났다.
"돌아가는 삼각지"를 부른 그는 젊은 날에
영영 돌아오지 못 할 길로 가버렸다.
그는 "마지막 잎새"를 부르면서 마지막 잎새가 되었다.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의  차중락은 29세의 청춘에 낙엽처럼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간다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
"이름 모를 소녀"를 열창하던 선망의 젊은 가수 김정호는 20대 중반에 암으로 요절, 노래 가사처럼 진짜로 가 버렸다. 

"이별의 종착역" "떠나가 버렸네" "내 사랑 내 곁에"를 불렸던 가수 김현식도 젊은 나이에 우리곁을 영영 떠나 버렸다. 

"우울한 편지"를 부른 가수 유재하는 교통 사고로 우울하게 사망 했다.

하수영은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를 부르고 세상을 떠났다. 

가수 김광석은 "서른즈음에"를 부르고 나서 바로 그 즈음에 세상을 떠났다. 

"이별"을 불렀던 대형가수 패티김은 작가 길옥윤과 이별했으며, 

고려대 법대 출신의 가수 김상희는
"멀리 있어도"를 부르면서 남편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어 떨어져 살았다. 

가수 조미미는 35세 까지 미혼이었는데
"바다가 육지라면"이 히트되면서 재일교포가 바다를 건너와 결혼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노처녀로 지내다 "만남"을 부른
노사연은 이무송을 만나 결혼 했다. 

"세상은 요지경"을 불렀던 신신애는 사기를 당해 모든 것을 잃었다. 
노랫말 그대로,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을 친다"였던 것이다. 

쨍하고 "해뜰 날" 돌아 온단다을 불렸던 가수 송대관은 한 동안 이런저런 사연을 겪다가 노랫말 대로 쨍하고 해뜨는 날을 맞았다.
그의 첫 히트 곡  대로 세월이 약이 된 것이다. 

가수가 노래 한 곡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는, 
같은 노래를 보통 몇 백, 몇 천번을 부른다고 하는데,

이렇게 몰입 하다 보면, 동화현상이 생기면서, 그의 운명도 이와 비슷하게 변한다는 것이다.

우주는 유유상종의 법칙이다.

감정을 있는 대로 넣어 부른 노래들은 자기 자신이 그 노래의 주인공이 될 수 밖에 없고,감정을 제대로 넣어 부른 노래가 힛트 하는 것은 당연하며,

이렇게 힛트한 노래를 수 백, 수 천번을 부르면서,
그 잠재 의식은 나중에 현실의 세계에 다 투영 되며,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지난 시절 노래 가운데 "팔도강산"이 있었다. 

노래 가사에 "잘 살고 못 사는것 마음 먹기에 달렸더라"는 소절이, 가난했던 시절에 큰 희망과 용기를 주는 노래 였다. 

이 노래 가사 대로 우리 국민은 마음먹고 노력한 결과 오늘날의 경제부국을 이루게 된 것이라하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말의 힘이 어느 정도인가" 를 여러 각도 에서 조사했다. 
가수 100명을 대상 으로 "히트곡이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를 조사해 보니,

놀랍게도 91명의 가수가 자신의 히트곡과 같은 운명이 되었고,
요절한 가수들은 너나 없이 "슬픔과 죽음이 연관된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을 발견 했다. 

'노래'는 '말'에다 '곡조'를 실은 것이어서
"말 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 한다".

"밝고 즐겁고 힘찬 노래만 불러라. 
그것이 성공하는 운명을 만드는 행진곡"이다.

노래 대로 운명이 만들어 진다." 

"한국 노랫말 연구회" 에서도 '슬픈 노래를 부른 가수들은 일찍 죽거나 슬픈 운명의 길을 걷는다'라는 사실을 발표 했다. 

말은 그대로 된다. 
자녀에게 실망할 일이 있다고, 
"빌어먹을 놈"이라고 하면,
그 자녀는 
"빌어먹을 놈"만 될 것이다.

"배고파 죽겠다.
귀찮아  죽겠다 
힘들어 죽겠다."고 하면 죽을 일만 생겨나게 된다. 
"말 대로 이루어진다."
  

 -좋은 글 중에서-

 
■ 역사의 향기/報恩(보은)

조선 영조 때 서울 정동에 고려 말 충신 이색의 14대
손 이사관(李思觀1705~1776)이 살고 있었다.   

승정원 동부승지 벼슬을 하다 물러나 한가한 생활을 하던 그는 급한 볼일이 생겨 고향인 충청도 한산에 가게 되었다. 

갑자기 몰아치는 눈보라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는데 예산 근처에 이르렀을 때는 유난히 기온이 떨어져 얼어 죽을 지경이었다.   

눈을 헤치며 걸음을 재촉하던 이사관이 어느 산모퉁이에 돌다보니  다 헤진 갓에 입성마저 추레한 한 선비가 쩔쩔매며 서있고 그 옆에는 부인인 듯한 젊은 여인이무언가를 끌어안고 쪼그려 앉아 있었다.   

이사관이 다가가 보니 놀랍게도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사관이 “뉘신지 모르겠으나 여기서 왜 이러고 계시오?”라고 물으니 추레한 선비가 안절부절하며 

“아내가 해산일이 가까워 처가에 데리고 가려고 나섰는데  그만 여기서 몸을 풀었지 뭡니까.   

이런 날씨에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고  이 험한 날 씨에 산모와 어린 것이 생명을 부지할지 모르겠구려!  아이고 이를 어쩌나?”

발을 동동 구르며 애타한다. 이사관은

“아이구! 저런! 큰일이구려!”라고 한 뒤  자신이 입고 있던 값비싼 양털 가죽옷을 벗어 아기와 산모에게 덮어주고 선비를 재촉하며 마을을 찾아 나섰다.   

어느 마을에 도착하여 급한데로 방 한 칸을 빌리고 집주인에게 두둑히 돈을 주고 산모의 방에 군불을 뜨겁게 지피도록하고 미역국을 끓여 산모의 허기를 면하도록 해주었다.   

가난한 선비는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고 하며 이사관의 손을 잡고 

“노형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아내와 어린 것이 큰일을 당할 뻔 했습니다.  이 큰 은혜를 어떻게 갚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한다. 

“남의 곤경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아무쪼록 가시는데 까지 무 사히 가시구료.” 

이사관이 길을 떠나려 하자 한사코 이름을 묻는다.
“정동에 사는 이사관 이라고 하오.”

이후 이사관은 이 일을 잊어버렸지만 가난한선비는 가슴 속 깊이 이사관 이름을 새겨 넣었다. 

가난한 선비는 몰락한 양반가 자손 충청도 면천의 생원 김한구(金漢耉 1723~1769)였다.  그로부터 십 수 년의 세월이 흘렀다.   

김한구는 여전히 ‘똥구멍 찢어지게’ 가난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가난에 견디다 못해 먼 친척 아저씨뻘 되는 당시의 세도 재상인 김흥경에게 의지하려 길을 나섰다.   

김흥경은 친척 조카뻘 되는 김한구를 딱하게 여겨 이따금 쌀가마니 정도를 도와 주곤해서 겨우 연명하며 서울 생활을 견딜수 있었고 가끔 아저씨 사랑방을 찾아가 놀다 오곤 했다. 

마침 김흥경의 생일날 이집의 사랑방에는 찾아온 축하객들이 아침부터 북적였다.   

대부분 높은 벼슬아치거나 신분이 쟁쟁한 사람들이었는데 그 속에 김한구도 한쪽 구석에 여전히 초라한 모습으로 끼어 앉아 있었다. 

그 자리에는 관상을 잘보는 것으로 장안에 유명한 문객도 섞여 있었는데 문득 주인대감 김흥경이 심심 파적으로 

“여보게 음식이 들어올 때까지 여기 계신 대감들의 신수나 보아 드리게.”라고 했다. 

문객이 이사람 저사람 관상을 보아주었을 때 김흥경이 웃으며 말했다.

“여보게 저기 윗목에 앉아있는 김생원은 내 조카뻘되는 사람인데 언제쯤이나 사는 형편이 나아질지 보아 주게나.”

그 말을 들은 문객은 김한구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더니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큰절을 하고 말했다.

“생원님의 고생은 이제 다 끝났습니다.  오늘부터 좋은일이 시작되어 불과 10여일 안으로 대단한 벼슬 운이 트일겁니다.”

이 말을 들은 방안의 사람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사람 팔자는 모른다는 말이 있지만 기적이 생기지 않는 한 가난의 때가 쪼르르 흐르는 보잘 것 없는 궁짜 낀 선비가 열흘 안에 높은 벼슬을 받게 된다는 것은 말이 안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이때는 나라에서 과거를 보는 시기도 아니며 설사 과거에 갑자기 급제한다해도 미관말직에서 벼슬이 시작되는 것이지 높은 지위를 부여받는 길은 없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드러내놓고 조롱하며 웃음을 터트리자 문객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지금은 모두들 웃으시지만 며칠만 두고 보십시오.  여러 대감님들도 생원님께 절을 올려야 하는 처지가 되실 겁니다.”

나중에 문객이 한 이 말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았다.   

때문에 가벼운 농담 정도로 생각하던 대신들이 웃음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는데 주인대감 김흥경이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리고 마침 잔칫상이 들어오는 바람에 분위기가 겨우 수습되었지만 당사자인 김한구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고 음식도 못 얻어먹고 황급히 자리를 떠야 했다.   

자기 때문에 분위기가 망쳐질 뻔했기 때문이다.

“에이 참! 오늘 재수가 없으려니 그 점쟁이가 미쳤나? 
왜 그런 당치도 않는 소리를 해서 사람을 난처하게 만드나?   

오랜만에 주린 뱃속에 고기구경좀 시켜주려 했더니 그놈 때문에 다 그르치고 말았네!”

투덜거리며 집에 돌아와 보니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금년 들어 열여섯 살인 딸이 왕비 간택의 대상으로 뽑혀 대궐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아이가 지난날 눈이 쏟아지던 길바닥에서 태어나 이사관의 도움으로 생명을 건진 그 아기였다. 

아이가 용모가 뛰어나고 총명했기에 은근히 부잣집에 시집보내 그 덕을 좀 보려는 욕심도 있던 김한구였다. 

당시 영조는 이미 예순 다섯 이였으나 정정했고 늘그막에 중전인 정성황후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나라의 법도상 국모자리를 비워둘 수 없어 영조는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간택령을 내리게 된 것이었고 가난하지만 뼈대있는 가문이었던 김한구의 딸도 후보자 중 한명이 되었던 것이었다. 

간택일이 되자 백 여명의 후보 규수들이 대궐로 모였고 영조가 친히 접견하여 그 중 1명을 선택 하였다. 

김한구의 딸의 미모에 혹한 영조가 그녀의 사주단자를 자세히 들여다 보고는 

“면천 태생인 김선비의 여식이라 애비는 김한구, 본관은 경주, 조상은 효종 때 바른 말 잘하기로 소문난 유명한 김흥욱이란 말이지? 흠! 이만하면 문벌도 괜찮구나!”

결국 간택을 받게 되었다. 

김한구는 문객의 예언대로 정일품 보국승록대부 오흥부원군의 작위를 받았고 신분이 하늘처럼 높아져 금위대장 병부까지 하게 되었으며 아들과 아우까지 벼슬을 얻었다.

오두막살이에서 1백여 칸의 고래 등 같은 집으로 옮겨 살게 되고 죽마저 끼니를 때우는게 어려운 생활에서 초호화판 생활로 갑자기 바뀌었다. 문객의 말이 제대로 맞은 것이다. 

김한구는 잊지 않고 딸에게 청을 넣어 은인인 이사관은 호조판서가 되었고 이어 영조 48년(1772년)에 우의정에 이어서 좌의정에 오르게 된다.

옛날 베푼 은혜가 큰 복이 되어 돌아온 셈이요 김한구는 은인에게 제대로 된 보은을 하게 된 셈이었다. 

이래서 세상일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 있는 듯하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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